제목 : 대구예총 권 정 호(49회) 회장 등록일 : 2004-12-17    조회: 891
작성자 : 사무국 첨부파일:
대구 동구 신천3동 학산빌딩 5층 그의 화실에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대구지회 권정호(49회) 회장은 내년 7월에 있을 <상해미술관 초대전>을 위해 작품제작과 250면의 도록 제작 등으로 분주하다.

10개 대구예술단체장인 그는 시간을 쪼개어 써야할만큼 바쁘다.
며칠전 권 회장은 <대구문화재단설립>과<대구대표축제>를 위한 TV좌담회에 참석했다.

현재 대구시에는 약령시축제, 오페라축제, 섬유축제, 예술축제 등이 있지만 시민의 자긍심과 참여도를 높이고,동시에 산업, 관광에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<거리 패션축제>가 타당하지 않을까를 생각 중에 있다.
권정호 회장은 향토 문화예술을 진작시키고 문화예술의 도시 대구에 걸
맞는 여러가지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는데 남다른 열정과 집념이 있음은널리 알려진 사실이다.

지난 12월 7일 <상해미술전시회>를 위해 대구의 미협, 사협, 건협과 시의회 교육사회위원장 등을 인솔, 상해를 다녀왔으며 오는 17일에는 <대구의 힘·문화의 역할>이란 주제로 대구를 변화 발전시키는데는 무엇보다 굴뚝없는 공장이랄 수 있는 문화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취지의 아트포럼을 120여명의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그랜드 호텔에서 가질 계획으로 있다.

사실 1996년 대구미협회장에 취임한 권정호 회장은 그 당시 대구시립미
술관건립추진(777억 예산 2005년 착공), 이인성 미술상 제정 시행, 달구벌대종 문양 제작기획 단장, 그리고 가창의 정대분교를 <문화의 집>으로 개관한 것 등 굵직한 사업을 추진, 마무리지으면서 대구미협 사상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일들이다.

특히 대구미협회장으로 전국미협부 이사장을 겸임한 권정호 회장은 당시서울이 거의 독점해오다시피한 투표권을 지방도 대등하게 할 수 있는 <전국투표권 획득운동>을 전개하여 싸워 이긴 점으로도 유명하다.

권 회장은 군복무 후 1982년 도미,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급인 뉴욕 프렛
대학원에서 수학했다. 이 무렵은 국내에서 홍대, 계명대, 부산사대 등에서 미술학과를 개설할 때였다.
1986년에 귀국한 권정호 회장은 지금까지 대구대학교 조형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.
권 회장이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1979년<신조회>의 일본 교류전에 참가하고 나서‘세계미술의 흐름은 이게 아니다’고 지각한데 있었다.
당시 세계적인 흐름은 포스트 모더니즘이었는데 유학 후 권 회장은 그것에다 자연을 축출하고 추상적인 그림으로 <점>, <해골> 등을 작품제작에 투입했다. 남들이 꺼리는 해골을 소재로 삼게 된 것은 의사이던 선친과 의대생이던 친형을 통해 실물 해골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이 청소년 시절 사람에 대한 두려움, 죽음에 대한 공포, 그런 것으로 잠재해 있다가 뉴욕 유학시 작품으로 형상화 되었다.

개인적인 활동상황 못지않게 그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<Sound Ⅲ> <어느날 밤> <해골> 등 3점, 부산시립 미술관에 <인간은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갈 것인가>, 대구문화예술회관에 <동굴> <예감>, 미국 Murray 주립대학에 <오브제 1점> 등 소장되어 있다.

한국예총 예술문화상, 대구시 문화상, 지역문화발전 공로상을 수상한 권정호 회장은 대한민국 미술대전운영심사위원, 한국미협 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아시아예술학회 회원, 대구경북지역 혁신협의회 위원으로 있다. 개인전을 12회나 가졌으며 지난해 개인전 수익금 중 상당액을 대구미협에 전달하기도 했다.

가족으로는 부인 전명희(교육학 박사, 유치원 운영) 여사와 1녀가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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